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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少年(미소년) - 6부하
16-01-22 18:37 705회 0건
혁과 우쿄가 대학 정문 앞에 도달했더니 영진이 예순 중반의 노신사와 같이 얘기를 하고 있다가 혁에게 손짓을
했다.
혁은 그 노신사가 안면이 있었다.
<민혁아, 니 영재 아버지 알재? >
<알지. >
일행에게 다가온 혁은 그 노신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영진의 말이 영재-3학년생이 집에 퇴학 당한 것을 숨긴 채 등록금 명목으로
송금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미 퇴학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 있음에도 말이다.
안 그래도 아들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해 있는 아버지가 야단을 쳤더니
그 뒤 소식이 끊겨서 내심 걱정이 된 그의 아버지가 서울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숙집에서도 –무슨 쓰레기 하치장을 만들어 놓고 하숙비도 밀릴 대로 밀려서 집주인을 민사소송까지 고
려할 만큼 화나게 만든 채로- 나가버린 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글쎄요, 저도 그 친구 본 지가 오래 되어 놓아서….. >
문득 생각난 게 있는 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장운석씨? 나 강민혁이라는 사람인데, 알지요? 어? 그래? 그 연습장이라는 곳의 위치가 어디예요? .
음음, 그래 알았어요, 고마워요. >

잠시 뒤 혁은 집으로 가서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승용차를 끌고 와 전원 차에 태웠다.
우쿄에게는 안 좋을 꼴을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지만 따라나서는 데는 할 수 없이 설마 별일 있겠냐
싶어서 자신의 옆의 조수석에 태웠다.
우쿄는 “이 영재”라는 사람이 설마 신입생 환영회 때 자신에게 주사를 부리고 행패를 부렸던 그
3학년생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우쿄는 백미러로 흘금 신사를 살펴봤다.
뚱뚱한 체격에 거만해 보이지만 그다지 존경심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혁 일행이 도착한 곳은 변두리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계단에 들어선 순간에 짐을 꾸려서 들고 있는 뮤지션인 듯한 몇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야!! 어디서 저런 찌질이 새끼를 알아가지고 사람 헛고생을 시키냐, 엉? >
<씨X!! 낸 들 알았냐? 저런 얼치기인 걸? >
<저 개또라이 새끼 때문에 돈만 날리고, 뭐야!! 재수없이!! >
그 뒤 그 연습장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더니 안은 아수라장阿修羅場이었다.
계란 판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약간 어두컴컴한 실내에서는 다른 물건들은 어수선하게 바닥에 흐트러져
있고 드럼 등의 악기에 웬 빨간 딱지들이 붙어 있었다.
우쿄는 –아까 그 청년들에게 얻어맞아서-얼굴에 피 멍이 든 채로 사람들에 둘러싸여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배에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는 노출이 심한 차림의 음탕해 보이는 백인여자 그림이 그려진 찢어진 검은 색
티와 역시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사람이 안면이 있다 싶다가 신입생 환영회 때 자신에게 주사를 부렸던 그 3학년생임을 깨닫고 기겁을 해서 순간적으로 혁의 뒤로 숨어버렸다.
손을 뒤로 뻗어서 우쿄의 등을 감싸 안은 혁은 그 모습이 무서운 것을 보고 어른 뒤로 숨는 어린애 같다고 느꼈다.
하긴 우쿄는 겉으로 봐서는 키만 좀 커 보일 뿐이지 아직 고학년高學年의 초등학생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는 외모이다. 어른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연약한 어린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이 자식!! 잘 들어!! 밀린 임대료에는 모자라지만 아직 젊은 놈이 인간이 불쌍해서 이 정도로 봐준다.
당장 여기서 나가!! >
아마도 이 건물주인 듯한 사람이 임대료 대신에 악기 등 일단 돈이 될만한 물건을 법원을 통해서 몰수하고 퇴거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법원의 집달관인 모양이다.
<악기는 안됩니더, 할부금도 아직 못 갚았어예, 임대료는 꼭 값을 꺼니까예….. >
<이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다리 몽둥이라도 하나 부러지고 싶어, 앙?!!
네놈 새끼 때문에 건물 값까지 떨어지게 생겼어, 알아?!!!>
영재 아버지가 보다 못해 나서려 했다가 혁과 영진이 제지했다.
일단 4명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집주인과 집달관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올라갔더니
영재 한 명만 덩그러니 멍한 표정으로 아까 전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혁 일행을 보더니 귀찮다는 듯, 혹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씨팔!! 뭐꼬. 또 뭐가 남았던 기가? >
<이, 호로 새끼!! 뭘 잘했다고 씨부리 대샀노, 으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그의 아버지가 참다 못해 자신의 아들에게 달려들어서 옆의 막대기로 구타毆打했다.
아들에게 화도 나고 실망도 하고 더구나 서글프기도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써 안타까워서일 것이다.
그는 집에서 막내아들이었다. 부모의 빗나간 애정이 그를 삐뚤어지게 만들어버렸고 그 결과가 이런 것이었다.
아들에게 한참 울분을 퍼부었던 그의 아버지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 옆에 주저앉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들은 콧구멍에 꿰어 있는 동그란 피어싱으로 계속 코피만 흘려대고 있었다.
우쿄는 두 부자가 좀 불쌍하다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내뱉듯이 말했다.
<니. 밥 묵었나? >
실제로 점심 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일행은 근처의 갈비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기가 익혀지고 소주가 몇 잔 주거니 받거니 해지는 동안 잠시 말들을 잃었다.
혁과 우쿄는 소주 대신에 콜라를 마셨는데 우쿄는 미성년자니까 당연한 거고 혁은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뒤에야 조금 기분이 풀어진 영재의 아버지가 무척 어려 보이는 우쿄에게 관심을 보였다.
혁과 되도록 안 떨어지려고 들고 혁이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게 아마도 혁의 조카쯤으로 여겨진 듯 했다.
그냥 어른이 귀여운 꼬마한테 관심을 보이는 심정으로 –실제로도 무척 예쁘고 귀여운 남자아이라서- 우쿄에게
자상하게 말을 걸어왔다.
<맛있게 묵그라. 근데 니. 나이가 몇 살이고? 몇 학년이고? >
<아, 네 아…… 한국나이로 18살입니다. 그리고 대학 1년생입니다. >
우쿄는 수줍어하면서도 최대한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초, 중학생쯤이려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이도 많고 대학생이라니 의외라는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한국나이라니. 그러고 보니 말 하는 게 약간 발음이 어눌했다.
<니, 아니 자네. 고향이 어디고? >
<도쿄도 히나타市, 일본입니다. >
<……………일본사람이가? >
< はい, そうです。 (네, 그렇습니다.) >
영재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할아버지시절부터 교회목사였던 그의 가문은 일제시대에 기독교 전도라는 구실로 미신타파나
인습因習구제라는 미명하에 일제日帝 당국의 한국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에 협력했던 친일파 집안이었다.
외세의 권력에 기대어서 한국인 무속인들에게는 있는 대로 행패를 부렸던 그의 아버지가 정작 창씨개명과
함께 일본의 무속이라 할 수 있는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었던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 아들인 영재의 아버지조차 아직 친일파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가끔 사석에서 “엽전”들은 별수 없다는 둥 어떻다는 둥 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찬양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역시 일본은 어쩌니 저쩌니” 하며 치켜세우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일본인이 앞에 있으니 양심에 찔려서인지 낮이 뜨거워진 모양이지만………………
마산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충 주어들은 얘기가 있었던 혁과 영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좀 어려 보여서 그렇지예. 저희 학교의 이번의 03학번 신입생들 중에 늘 수석을 차지하는 수재입니다. >
영진이 우쿄를 자못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개했다.
<그렇나? 그러고 보니 똘똘하게 생겼데이…… 역시 일, 아,아니…… 부모 되시는 분이 부럽구먼……>
우쿄 덕분에 분위기가 약간은 화기애애해졌다.
자기 아들한테 넌더리가 난 영재아버지는 우쿄가 무척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쪽발이 새끼가 우리나라에는 뭐 한다고 쳐 기어 들어왔노?!! 일본은 우리나라의 원수다, 알겄나, 짜식아!! >
잠자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있던 영재가 우쿄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쥐방울 만한 어린애가 수재라니 아니꼽다고 여긴 데다 분풀이를 할 데가 필요했던 터에 얼치기
영웅주의英雄主義자인 그로서는 우쿄가 일본인인 것이 좋은 구실거리였던 것이다.
황당한 언어폭력에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했던 우쿄는 그나마 생겨난 3학년생에 대한 동정심이
싹 사라져버렸다.
< 미친 새끼!! 어린애한테 무슨 개 헛소리야?!! >
동시에 영진과 혁이 영재를 노려보며 야단을 쳤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분풀이를 목적으로 애먼 어린애한테 화풀이 따위를 하는 짓거리는 양아치도 안 하는
유치幼稚하고 비열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영재는 이내 혁과 영진의 기세에 압도되어서 이내 꼬리를 내렸다. 몇 달 전에 혁에게 얻어터진 기억이
악몽처럼 남아 있었다.
<야 이노무 새끼야!! 니가 지금 큰소리 칠 입장이가, 으이?!!! >
역시 어린애한테 분풀이를 하는 아들의 후안무치에 간신히 진정되어 있던 화가 되살아난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호통을 쳤고 이어서 지금까지의 일을 힐난詰難하기 시작했다.
나오는 말이 고등학교 때도 집안의 골칫거리였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한번 대입에 실패하고서는
집에서 보내주겠다는 신학대학에도 안 가겠다며 버틴 채 빈둥거리며 날 건달 짓이나 하는 아들을
사람 만든다고 돈과 인맥을 이용해서 서울의 대학에 억지로 쑤셔 넣었더니 공부를 통 안 하고 –음악적인
재능 따위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주제에- 록 음악 한답시고 사고만 쳐대서 막대한 돈만 낭비하고
덕분에 집안 재산만 축냈다는 것이다.
대학 4년 동안에 유급 등으로 고작 올해 퇴학 전에 겨우 3학년에 턱걸이를 했을 정도이다.
그러고도 학교에 부정 입학한 사실에 심지어 재작년에는 아들이 여자를 강간해 체포당할 뻔하고 간신히
합의로 풀려난 사실까지 드러나 개인적으로도 교회 목사로서 쌓은 인망에 흠집을 남기고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버지한테 병역을 면하게 해달라고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재가 개인적으로 진 빚만 수천만 원이나 되고 값을 능력이 전혀 안 된다는 말도 있었다.
<………… 더는 말 안 할 란다. 니 돈은 내가 어떻게든 값아 줄 테니까네 대신에 일단 군 복무부터 끝내는 기다.
갔다 와서 더는 속 썩히지 말고 얌전히 교회 일이나 돕다가 신학교라도 다니그라, 알겄나, 으이?!! >
우쿄의 사고방식으로서는 아들이 진 빚을 아버지가 값아 주어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이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혁은 우쿄의 의문에 동의는 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실은 석주와 호프집에서 한 이야기 중에 석주에게 들은 말이 우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는 걸
공부에만 신경 쓰라는 핀잔을 해주는 걸로 답해주었다며 그게 실은 소위 일본인의 “한 사람 몫 一人前”
이라는 사고방식임을 알고 있는 석주는 한편으로는 기특하면서도 한국인인 아버지의 사고방식으로는
내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런 걸 의식하는 게 혹시 아직도 아들이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친 가족에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좀 서운했다는 것이다.
<싫어예. 안 갈랍니더!! >
<뭐라꼬?!!! 와 안 가겠다는 긴데?!! >
< 내는 청운의 꿈을 가지고 올라온 긴데 그냥 군대 들어가믄 억울하단 말입니더!! >
<청운의 꿈? 웃기고 있네!!!! 지금 니 꼬락서니를 봐라!!! 생 거지꼴을 해갖고 뭔 빌어먹을 노무 꿈이고, 으이?!!!>
< 내를 그만 내비 두소.!!>
이어서 두 부자간에 거친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두 부자의 언쟁에 질려서 고기는 한 점도 입에 못 대고 그냥 숯불에 태워서 아까운
돼지갈비를 숯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애초에 아버지는 설령 아들이 이런저런 사고를 안 치더라도 아들이 겉 멋에 딴따라 짓거리나 하면서
집안망신이나 시키는 게 마음에 안 들었고 –허황된 꿈에 빠져서- 록 뮤지션이 되어서 화려하게
출세하겠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아들로서는 군대도 가기 싫고 지루한 교회목사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서도 아버지의 위선과 권위주의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아버지한테
보이는 기생충적인 행태로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었다면 혁처럼 아버지에게서 진작에 나와 홀로서기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지도 못하면 자기 분수에 맞게 사고나 치지 말든가……
드디어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래!! 니 멋대로 하그라, 대신에 앞으로 니랑 내랑은 더 이상 아들하고 아버지가 아니다!! 알겄나?!!!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그라!!!!>
일어난 아버지는 크레디트로 음식값을 계산하고 나가버렸다. 두 부자 사이에 끼어 있던 세 사람도
일어나서 나갔다. 그 와중에 자리를 돌아보니 영재는 앉아만 있었다.
세 사람은 그가 조금은 아버지한테 미안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는 앞으로 막막하다는
생각에 아버지한테 돈을 뜯어내지 못한 것만 아쉬워하고 있었다.
앞의 소주를 병나발을 불기 전에 중얼거리는 걸 들은 세 사람은 차갑게 헛웃음을 지었다.

밖으로 나온 뒤 혁과 영진이 두 부자를 한 명씩 맡아 진정시키고 설득하기로 했다,
원래 두 사람은 남의 가정 일에 개입한다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매정하게 놓아두고 가버릴 수도
없고 너무 깊이 발을 담그고 말았다는 생각에 할 수 없었다.
영진도 원래 영재와 친한 편이 아니다. 그냥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그나마 싸움에서 대등해서
대등하게 대거리를 했던 것뿐이다.
애초에 성적에서 중 상위권이었던 그로서는 문제아였기는 해도 상위권이었던 혁과 친 했지, 열등생이었던
영재와는 그가 시비를 걸다가 영진에게 두들겨 맞는 것 빼고는 상대할 일이 없었다.
다행히 혁이 압도적이어서 영재가 어린 날의 치기로 혁에게 덤벼드는 일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영진이 편했다면 편했달까?
그 뒤 영재가 혁에게 굴종해버렸고 애초에 싸움을 좀 할 줄 알다 뿐이지 얌전한 편이었던 영진은 차치하고
혁도 석주를 만나서 마음을 잡고 공부에 매진했기 때문에 자기보다 강자인 혁과 영진이 잠잠하자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다 는 식으로 영재가 계속 건달들의 짱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것뿐이고…….

영진이 우쿄와 같이 영재의 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카페에 들어섰다.
<정말로 영재를 내버리실 겁니꺼? >
<말했다 아이가? 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닌기라. 와 내가 저 노무 새끼 때문에 허구헌 날 얼굴에
똥칠을 해야 하노 말이다!! 절마는 자식새끼가 아니라 원수인기라!! >
영진은 그냥 술이 좀 들어간 영감이 홧김에 하는 얘기거니 생각했지만 노인의 태도가 약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 영진에게 담배 한 개비를 달래서 불을 붙이고 피우기 시작했다.
우쿄는 잠자코 밀크 티를 홀짝거리고만 있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고 우쿄와는 상관 없었다.
하지만 우쿄에게는 이 일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영진이 혁 쪽을 보고 오라고 해서 차를 다 마신 뒤 밖으로 나왔다.
한편 혁은 영재를 건물 구석으로 끌고 가서 강경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군대부터 갔다 와!! >
<니가 뭔데 나한테 태클이고, 으이? >
놈은 내심 혁의 주먹이 두려우면서도 취기醉氣에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대한민국 남자가 되어 갖고 군대를 안 가겠다면 어쩌겠다는 건데? 병역법 위반으로 또 호적에
빨간 줄 그을래? 그리고 네가 이제 서울에서 뭘 할 거야? 뮤지션? 웃기고 있네!! 너는 기타만 댕강거릴 줄
알 면 다 뮤지션이 되는 줄 알아, 어?!! 네 실력으로는 거리 악사로 동냥질도 과분해!! >
혁은 무자비하게 영재를 몰아붙였다. 인정을 베풀 가치가 있어야 베풀어도 베풀 것이 아닌가?
첫째로 예비역 육군 장교인 혁으로서는 –아니한 말로 어디가 부러져 장애자가 되었든 가 해서-
군대를 못 간다면 몰라도 자기 멋대로 안 가겠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둘째로 이 녀석 음악실력은 혁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실력으로 뮤지션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차라리 입대 전에 록 밴드 동아리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는 혁이 작정하고 노력하면 록
뮤지션으로 성공할 소질이 월등히 높았다.
하긴 그러기에는 이제 28살이라는 나이는 좀 많았지만…..
<상관 마라!! 되면 된다 아이가.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군대 같은 데는 왜 가노? 가는 놈이 등신이쟤!! >
<뭐? 뭐가 어쩌고 저째?!!!!!!!!!!! >
기가 막히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열이 뻗친 혁은 키는 작지만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녀석의 멱살을 잡고
그 덩치를 들어올린 뒤 주먹으로 칠 기세였다.
그 순간에 우쿄가 달려들어 혁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렸다.
< 先輩!! 殺人はだめです!!!(선배!! 살인은 안돼요!! >
“폭력”이라는 단어가 엉겁결에 “살인”으로 바뀌었지만 혁은 그 말이 묘하게 코믹하게 느껴졌다.
혁은 약간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좋아, 너 좋을 대로 해. 네 아버지는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거고 너는 그걸 네 발로 찬 거니까.
대신에, 네가 진 빚은 네 아버지한테 손 벌리지 말고 절대적으로 네 손으로 해결해.
그러고 뮤지션이 되든 뭐가 되든 스스로 하란 말이다. 남의 등을 칠 생각하지 말고, 알았어?!!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혁은 쥐고 있던 녀석의 멱살을 내 팽개치듯 놓고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영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안도한 우쿄는 그를 흘끔 보고는 바로 혁의 뒤를 따랐다.
골목을 나온 혁은 아까 우쿄의 말을 상기하고는 큭큭하고 웃으며 우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이 너는 내가 진짜로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보였니? >
우쿄는 머리를 쓰다듬는 혁의 손길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 そうではないが.....(그건 아니지만요……) >
그때 영진이 카페를 나오고 있었다. 혁을 발견한 영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었다.
실제로 두 부자관계는 완전히 절단絶斷난 느낌이었다.
<뭐, 우리로서는 우연히 휘말린 것뿐이고 이만하면 성의를 보인 거야.
어차피 저 두 부자의 일이니까…… >
<맞는 말이다, 마. 우짜겠노? >
잠시 뒤 카페에서 영재의 아버지가 나오더니 혁에게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줄 것을 청했고
혁은 그러겠다고 했다.
노인은 골목에서 나오는 자기 아들을 흘끔 보더니 그대로 외면해 버렸다.
노인의 재촉에 혁은 영재는 놓아두고 차를 출발시켜버렸다.
- 그 뒤로 혁들은 그를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볼 수 없었다.
며칠 뒤 우쿄가 일본 대사관에 볼일로 시내에 갔다가 을지로의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그를 봤을 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노인은 혁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저 노마는 자네들도 인쟈 신경을 끊으라. 혹시 절마가 찾아가면 절대
도와주거나 하면 안된데이. 그건 그렇고 자네들헌테 신세를 졌구먼.
고맙고 미안하다, >
<아닙니다. 저희들이 힘이 못되어 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이다!! 괜히 남의 가정사에 휘말려서 욕들 봤다 아이가? >
거기까지 말을 한 그는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어이쿠야!! 서울이 크긴 크네!! >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노인을 버스에 태워 보낸 뒤 영진도 볼 일이 있다며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혁과 우쿄만 남았다.
<형. 여기 좀 구경하면 안돼요? >
<버스터미널이 뭐 볼 거나 있니? >
<우리나라-일본-에는 이런 큰 버스 터미널이 없거든요. >
하긴 일본은 신칸센新幹線으로 대표되는 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우쿄로서는 도쿄역이나 우에노역, 신주쿠역 같은 대형 철도 역이라면 몰라도 초대형의 버스터미널은
처음 보는 것이다.
한국은 신칸센 격인 KTX는 개통하려면 아직 1년이나 남았고 서울에서도 서울역이나 큰 편이니까…..
그래서 둘은 터미널 안을 견학했다. 혁으로서는 버스터미널에서 데이트라니 좀 생소했다.
우쿄는 버스터미널이라는 곳이 다른 의미로 신기했고 혁이 옆에 있어서 좋았다.
강남 구 터미널은 경부선 등의 동남쪽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고 그 옆의 새로 건축된 센트럴시티는
호남선이라 불리는 서남쪽으로 향하는 버스의 기 종점이었다.
우쿄는 철도가 아닌 버스로 전국을 연결한다는 게 신기하다고 느꼈다.
실은 우쿄는 한국의 철도네트워크가 거의 거미줄 수준인 일본에 비해 부실한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중학교 때 학교소풍으로 전세버스를 탔다가 멀미로 생고생을 한 경험이 있는 우쿄로서는 절대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왜, 버스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 한번쯤 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걸? >
센트럴시티 버스터미널 지하층의 분수대噴水臺에 걸터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혁이 말했다.
혁은 카페로 갈까 했는데 우쿄는 여기가 좋다는 것이다.
<그런가요? >
<……………..다음에 우리 한번 고속버스로 밀월여행, 어때? >
둘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아까 영재 부자의 모습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에 좀 침울해 있던 참이었다.
잠시 후에 웃음을 그친 우쿄가 좀 진지해졌다.
< うちに行けば (親)お父さんにもっとよくして上げたいです. 帰った (本)お父さんのまで (집에 가면 (親)아버지께 더 잘해드리고 싶어요. 돌아가신 (本)아버지의 까지)…… >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한국의 집에 있는 게 남의 집에 얹어있는 것 같아서 부담이 되거나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그의 말에 우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 そうのよりはただ生みの親というのも何年前に分かったしずっと落ちている途中一緒に住むようになったこともあって見たらお上手になりたいという考えに,,, それに親子の間でも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あると思うからです。(그렇다기 보다는 단지 친부모라는 것도 몇 년 전에 알았고 계속 떨어져 있다가 같이 살게 된 것도 있다 보니 잘 하고 싶다는 생각에,,, 거기다 부모자식 간이라도 지켜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해서요……….)>
참 다른 의미로 정이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밥맛”이라는 소릴 듣는 데는 이런 냉정함이 한몫 해서일까?
한국인 특유의 끈끈한 정이라는 것을 이 아이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 “정”에 데어서 친가하고 담을 쌓아버렸었지만;;;;;;
<………..하여튼 친부모한테 신세지고 있다는 식의 생각은 갖지 않도록 해. 일본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대개 한번 자식은 계속 품 안의 자식이라는 생각이니까 네가 은연중에 친 아버지한테
신세지고 있다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면 섭섭해 하실 걸?
아마도 친 부모는 너한테 못해준 것까지 몰아서 해주고 싶은 생각이니까 말야.
그리고 우경이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의 보호를 받는 게 당연한 나이잖아? 실컷 친부모께 어리광도 부리고…… >
우쿄는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네가 말한 것처럼 나중에 네가 본(本)부모께 못하는 것까지 친부모께 몰아서 해드리면 돼지, 안 그래? >
<네. >
그러고서 우쿄는 잠시 곰곰히 생각했다.
혁은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물었다. 우쿄는 무의식 중에 대답했다.
< いや, それでは兄貴も……(아니, 그럼 형도……)>
거기까지 말한 우쿄는 아차 싶어서 말을 그쳤다. 혁은 괜찮으니까 말해보라고 했고 우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했다.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형하고 아버님하고………… >
우쿄의 생각을 읽은 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우쿄는 역시 혁이 기분 나빠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었다.
혁은 터미널에서 지하철로 귀가하겠다는 우쿄를 직접 바래다 주기 위해 운전하면서 생각이 잠겨 있는 듯 했다.
이윽고 우쿄의 집 근방에 차를 세운 혁은 우쿄에게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경이가 말한 대로 나도 어떻게든 아버지와 화해할 거야. 노력해 볼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 >
우쿄는 내심 안도해 하며 그에게 안겼다. 가볍게 작별키스를 했다.
우쿄가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본 혁은 차의 방향을 들어왔던 길로 되돌리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자신도 아버지와 어떻게든 어색한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언제쯤 가능할까? 의외로 그날이 바로 눈 앞에 와 있었다.

화해和解

학교에서 몇 블록 정도 떨어진 혁이 거주하는 오피스텔은 30층의 주상복
합 건물로 지하에서 1~2층 까지가 상가인데 식당가도 조성되어 있고
거주민을 위한 헬스클럽과 대형마트, 세탁소등의 편의시설들도 있어서 혼자
생활하기에도 달리 불편한 것은 없었다.
–심지어 성인용품점도 있는 데에 처음 입주했을 때 혁은 실소했었다.
하여튼 헬스클럽은 시설 등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등록했다. -
전역을 앞두고 여전히 집에 들어가기가 좀 껄끄러웠던 혁이 –혁의 아버지에
게 부탁을 받은-친구가 전역 후에 거주할 곳으로 원룸을 알아봐주었다면서
계약을 강권하기에 –계약조건이 너무 좋은 게 좀 수상하다고 내심 의심하면서-
들어온 뒤에야 혁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건설회사에서 건설한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군 입대 후에야 건설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더 황당한 사실은 –회사에 적잖은 이익을 안겨주고 있는 이 時價
로 따져서 가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오피스텔의 - 명의名義상의 건물
주가 남도 아니고 바로 혁 본인이라는 것이었다.
만 번을 양보해서 자신의 부친의 사업수완은 인정한다 쳐도 과정이
떳떳하지 못한 면이 많다 보니 이것도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냉담하게
넘어가 버렸다.
처음에 조만간 달리 집을 구해서 나가려고도 했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기실 집세 등이 굳었던 것은 차치하고- 부친에 대한 마음도
누그러져서 이런 것까지 뿌리치는 것도 마음에 걸리다 보니 그냥 눌러 앉은
것이다.
뭐, 거주지는 그렇게 집에서 신세 진다 쳐도 그 외의 생활 등에서는
독자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현재로서는 일본어와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의 프리랜서 통역 및 번역작가
로 평균적인 샐러리맨 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입대전의 대학시절에도 전적으로 과외나 아르바이트 등으로 어렵게나마
직접 해결하면서 생활했었던 그였다.
만약에 아버지와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다면 원한다면 부유한 아버지 슬하에
소위 말하는 오렌지족-의 방탕放蕩한- 생활도 할 수 있었겠지만–단순히
멋을 위해 때때로 적절適切히 명품名品을 사용하는 것 외에 과도한 사치나
방종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던- 그로서는 설령 아버지와
한때 적대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집이나 아버지에 의지한다거나 하는
정신적인 미숙함 과는 애초에 무관 한 성격이었던 탓이고 최소한 스스로
살아갈 능력도 있다고 스스로를 믿어왔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래왔었다.
그로서는 마산의 외가로 쫓겨나다시피 한 순간부터 아버지의 슬하를 벗어나
완전히 홀로서기를 했던 것이다.
실은 장교로서의 군복무시기와 함께 비행청소년으로 10대 중 후반
때의 심히 삐뚤어지고 엇나갔던 시절이 역설적이게도 정신적으로 혁을
강인하게 단련시키고 인격적으로 성숙 成熟하도록 북돋아 주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뒤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서자
관리사무소장이 혁에게 접근했다.
혁이 이 건물의 명의상 소유주이고 자기 회사 사장 아들인 것은 그만 아는 비밀이었다.
<저기,,, 사장님께서………. >
<네? >
혁은 현관의 벽면에 높이 걸려 있는 시계에 눈이 갔다.
오후 8시 30분이었다.
관리사무소로 갔더니 –뭔가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아버지가 사무소 가운데의 소파에서 앉아있다가
혁을 보고 어색한 웃음을 보냈다.
혁도 담담한 태도로 아버지를 응시하고는 역시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참 오늘 무슨 날인가 싶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거처치고는 깨끗해서 좋구나? >
<아, 네. >
혁의 원룸에 들어선 아버지는 정연整然한 원룸의 분위기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로서는 아들을 마산으로 내려 보내고 처음으로 아들의 거처에 들어와 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으로 원룸을 둘러보다가 문득 짓궂은 표정으로 혁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여자를 데려 온 적이 있었니? 너 정도라면 웬만한 미녀美女들을 꼬실 수 있었을 텐데……>
혁은 역시 아버지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호색好色이 이전처럼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오히려 솔직하고 건강하셔서 좋게 느껴졌다.
<미녀뿐이겠어요? –조만간 어여쁜 미소년도 데려올 테니까요. ->
미녀뿐이겠느냐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설마 아들이 남색男色을 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누군가의 말마따나 “치마만 두르면 얼마든 좋다”는 식으로 해석해-유쾌하게 웃으며 거실
한가운데의 앉은 탁자 위에 손수 가져온 고급 와인과 거기에 걸맞은 안주 용 치즈 등을 내려
놓았고 그걸 본 혁은 싱크대에서 와인잔등을 꺼냈다.
거의 처음으로 부자간에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때 집에서 아버지에게 차갑게 대들고 학교에서 싸움질만 하면서 속을 썩히던 아들이었다.
–물론 학교에서 맞기만 하는 것 보다야 주변학교의 심지어 상급생들까지 무자비하게 꺾어버려서
절대강자로 주변을 공포에 떨게까지 만들었다는 강인한 아들이 내심 기특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아들을 마산으로 내려 보냈던 것도 혁이 친 대형사고에 질린 서울에서의 선생이 아들을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다며 자퇴서를 내미는데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였지만 그 뒤 마산의 학교에서
좋은 선생-석주-을 만나 절치부심하며 노력해 명문대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혼자 올라온 아들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때도 아버지에게 차갑게 대하고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한 채 혼자
살아가는 아들이 섭섭했다.
심지어 대학 등록금이라도 내주겠다는 걸 냉담히 거절한 아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를 임종순간까지 아프게 하고 배신한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재벌 2세로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치졸한 졸부근성까지
보이는 아버지의 경박한 모습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괘씸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내심 죽은 아내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기특했고 거기에 친구들의 아들들에 비추어서 스스로 가장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의 아들들이 부유한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나약하게 자라고 심지어 아버지의 부를 믿고 주색에
빠져 호사豪奢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급기야 사고까지 쳐대어서 아버지들을 실망시키고 있을 때 경위야
어쨌든 일찌감치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 혼자 일어섰던 혁이었다.
마산으로 내려 보낸 뒤로 솔직히 아들에게 그 어떤 금전적인 투자도 하지 않았고 아들의 싸늘한 태도에
할 수도 없었었다.
다른 친구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힘을 이용해 군역을 피하려고 안달하고
있을 때, 혁은 오히려 속은 썩히지만 군대에서 고생할 아들이 안쓰러워서
부정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시키려 하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스스로
ROTC學軍團에 지원하고 장교로서 군에 입대해 그 힘든 군 생활을 이겨내고
오히려 유능한 군인이자 지휘관으로서 상관들에게 人望을 얻었었다.
혁의 전역을 얼마 앞두고 아들 몰래 만나서 접대한 아들의 상관에게서 아들
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를 않는 것을 두고 내심 으쓱한 기분이 들었던
아버지였다.
덧붙여서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수려한 외모와 신사로서의 매너로 –거의 돈과 힘을 앞세워서
엽색을 해왔던 아버지와는 달리- 세련된 방법으로 여자를 사귀고 연애를 한다더라 는 보고를 듣고 있었고
집에서도 아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여러 관록으로 최고의 중매자리가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있었다.
혁의 아버지는 내심 자신의 아들이 지금은 친구들의 아들에 비해 가장 훌륭하다고 느끼고 있다.
금전적인 투자 이야기가 나와서지만 실은 이 오피스텔을 명의상이 아닌 실 소유주로 권리를 양도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들의 명의로 했던 것은 혁이 생각한 것과는 진정으로 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아들이 자신의 사업과 그 외 모든 것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아버지에게 실망을
느끼게 하고 마산으로 내려 보낸 이래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던 아들에게 일단 이렇게라도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혁은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는 말로 거절했다. 이전처럼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져서가 아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해서이다.
비록 대답은 거절이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아버지를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부자가 흉허물 없이 포도주를 기울이다 술병이 비어서 아들이 1층의 편의점으로 내려가 술을 더 사와서
거나하게 취하자 돌연 아버지가 약간 기분이 우울해져 있었다.
<이 아버지는 말이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겠냐고 욕을 할 지 모르겠다만, 너의 어머니에게
정말 못할 짓을 많이 한 게 사실이다.
아니, 너의 어머니 앞에서 나는 죄인罪人인 게야. >
<아버지…… >
<그리고 너도 이 아버지 때문에 여태껏 힘들어 한 것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아비만큼 죄 많은 인간도
없구나. >
흑맥주를 들이키고 나서 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까지 흘러나오고 있어서 혁은 놀라고 안타까웠다.
비록 염색을 해서 머리는 검게 만들었지만 눈가의 주름살을 보고 이제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초로初老의
아버지는 많이 늙으셨고 몸집도 이전에 비해 자신의 아들보다는 많이 작아지셨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까지 나오게 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불효자라는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어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너의 어머니에게 가게 되면 무릎 꿇고 사죄할 거다. 그 전에 먼저 너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었다. >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불효한 것은 어떻고요? 오히려
제가 아버지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지 않겠어요? >
<아니! 너는 오히려 이 못난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훌륭하게 스스로 서 보여주었다. 내 친구들 아들들에
비하면 너는 너무나 대단한 녀석이야. >
그런 아들에게 제대로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쏟지 않은 게 아버지로서는 못내 마음에 아파왔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더더욱 죄인이 된 기분이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혁은 지금까지 냉정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
<혁아, 이제 그만 이 아비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
혁은 뭉클한 기분을 억누르며 아버지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 쥐어 보였다.
15년 만에 부자가 화해를 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혁이 집에 와서도 이런저런 껄끄러운 감정으로
대화를 회피했던 두 부자였지만 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어온 터였고 아버지 쪽에서 먼저 굳게
결심을 하고 아들을 찾아온 것이다.

너무 취하신 아버지께 혁은 침대를 내어드리고 자신은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우려다 아버지의 청으로 같이
침대에 누웠다. 두 부자는 실로 오랜만에 같은 잠자리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식당상가의
해장국 집에서 가볍게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부자는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아버지의 고급 승용차에
같이 탔다.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학교까지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혁아. 이제 집에 자주 오도록 해라. 알았지? >
<네. >
<생각 같아선 네가 아예 집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한다만, 이제 너도 성인으로서 개인생활이 있으니
그러라 할 수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거기서 뜸을 들였다.
<새 어머니 말씀인가요? >
아버지는 기뻐했다.
요즘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호색기질을 거의 버리고 자신의 후처後妻에게만 남성으로서의 애정을
쏟고 있었다. 혁은 아버지의 후처를 아직 쑥스럽기도 하고 친 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은 것뿐이지
내심 새 어머니로 인정하고 있었다.
우쿄도 자기 식대로 “本 부모”라고 칭하는 일본의 양부모와 한국의 친부모 양 쪽 모두를 자신의 부모로 하고
있지 않은가?
우쿄의 양부모는 혁이 우쿄 본인과 전에 석주에게 듣기에, 친부모는 직접 겪은 바로 양 쪽 다 좋은 분들이고
훌륭한 부모들이다.
그래서 양측의 부모에 대해 혼란스럽다는 심경을 밝혔던 우쿄에게 좋은 부모가 이렇게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라고 우쿄를 위로해준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모친 쪽에 대해선 자신도 해당되지 싶었다.
새 어머니는 혁을 아들로서 대하고 있었고 남편의 전처에게 직접 제사준비까지 해줄 만큼 후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 거부감이 있어서 혁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기피하니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자신의 아내를 모친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스러웠던 참이었다. 근데 방금 “어머니”라고 칭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정식으로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할게요. 제대로 어머니로서 대접해 드릴 것이고요. 소희-의부여동생-도 제 동생이에요. >
<……고맙구나!! >
두 부자는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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