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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왕이 되자 - 37부
16-01-23 20:40 1,805회 0건
37.

새하얀 날개가 펄럭이자 천사의 몸이 정미희에게 날아갔다. 미희는 기겁하며 계속 달렸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천사들이 그녀가 이동할 경로를 제한했다. 어깨는 칼에 찔린 상처 때문에 피가 나고 얼굴은 눈물과 땀, 콧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쫓아오는 천사들을 피해 계속 달렸다. 분명 자신을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텐데도 천사들은 천천히 자신의 뒤를 쫓았다. 어딘가로 몰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허름한 건물 하나가 나오자 미희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몰아넣었군.”

2급 전사인 천사 하나가 말하자 3급 천사 네 명이 그 건물을 둘렀다. 악마왕 게임 참가자임은 분명한 여자. 천사들은 미희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악마들의 능력은 중구난방이다. 획일하고 규칙적인 천사들과는 달랐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미리 지정해둔 건물로 몰아넣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미리 설치된 마법진이 발동해 욕망을 사용하는 능력은 봉쇄될 것이다.

천사들은 이제 미희를 사로잡아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문을 열었다. 네평 정도나 될까? 한눈에 다 들어오는 조그만 건물의 내부. 숨을 곳 따위는 조금도 없는 공간이었다. 미희는 없었다.

미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열 때는 분명히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 문이었지만 지금 등에 기대고 있는 문은 익숙한 자신의 원룸 문이었다. 문자에 대한 답으로 ‘공간’이라는 답을 했던 그녀.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다. 그 대가로 얻은 능력은 어떤 문이든 욕망을 사용하며 열면 자신만의 공간인 원룸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다.

참가자는 몇 번 만났지만 심약한 그녀는 싸우는 것 보다 언제나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덕분에 그녀의 능력은 거의 최초로 얻은 수준에서 몇 걸음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천사라니…”

미희가 중얼거렸다. 그 날개는 분명 천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게임 참가자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악마의 능력으로 얻을 만한 외모는 아니지 않을까? 이제는 천사까지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미희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다른 참가자를 만나고 겁에 질려 도망갔던 그녀는 고민 끝에 시골에 있는 집에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도 없었다. 천사들의 습격을 받았으니까.

왜 이런 꼴이 된 거야? 대상이 없는 원망이 그녀에게서 솟구쳤다.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는 좋았는데. 언제나 곤란할 때면 혼자 집에 틀어박힐 수 있었으니. 좋았던 것도 잠시, 그 능력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드는 참가자들만 세명을 만났다. 이제는 천사들도 나타났다. 미희는 절망했다.

“불쌍해라.”

집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붉은 치파오를 입은 여자. 옆트임이 지나쳐서 허벅지만이 아니라 엉덩이 까지도 살짝 보이는 모습이었다. 미희는 공포에 질렸다. 언제나 자신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 이번에야 말로 죽는다는 생각이 절로 미희의 머리속에 생겨났다.

“살려 주세요.”

벌벌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했다. 치파오의 여자, 리빙빙이 가볍게 웃었다.

“누가 죽인데? 도와주러 온 거야.”

리빙빙이 미희의 몸을 일으켰다. 미희는 리빙빙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런 것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리빙빙은 혹시나 싶어 가져왔던 약을 꺼내 미희의 어깨에 뿌렸다. 칼에 찔렸던 미희의 상처가 약간의 통증과 함께 순식간에 나았다. 얼빠진 얼굴로 리빙빙과 자신의 상처를 번갈아 보던 미희의 얼굴에 공포가 조금 누그러졌다.

“누… 구세요?”
“악마.”

미희의 질문에 리빙빙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날개를 꺼냈다. 박쥐 날개를 닮은, 은은한 광택을 뿌리는 검은 날개가 살짝 펼쳐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와하고 짧은 탄성이 미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천사들의 날개도 아름다웠지만 그 광경은 여유롭게 감탄할 만한 순간은 아니었다. 미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살짝 날개를 만져보았다.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일단은 뭐 마실 거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손님이 왔는데.”

멋대로 들어온 건데 손님이라니. 미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커피 포트에 물을 받기 시작하자 리빙빙은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미희는 리빙빙의 느긋한 모습을 보며 그녀가 집 주인이고 자신이 손님이라도 되는 느낌을 받았다.

“조력자인 악마는 없는 모양이군.”
“네?”

포트가 물 끓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대화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레벨이 100을 통과하면 너를 도울 악마들이 올 수도 있거든. 그래서 네 레벨은 얼마야? 지니고 있는 욕망이 너무 같잖아서 가늠도 안되는군.”
“저… 3인데요.”

미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100레벨이 어쩌고 하니 아직도 한자리 수인 레벨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탓이다. 리빙빙이 멍하게 미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더 움츠러들었다. 딸깍-하고 포트가 물이 다 끓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미희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믹스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너 지금까지 뭐했냐?”
“그냥, 평소 지내는 대로…”
“만난 참가자가 하나도 없었어? 살아있는 게 신기하군.”
“몇 명 있었는데… 도망쳐서 살았어요.”

책망에 가까운 리빙빙의 말을 들으며 애꿎은 티스푼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고개를 들어 리빙빙을 바라보니 그녀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미희가 조심스레 커피를 내밀자 리빙빙이 한숨을 쉬며 받고는 홀짝였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군.”

미희는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후후 불었다.

“이틀 뒤면 참가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거야. 너도 가야해.”
“네에?”

저도 모르게 하이톤으로 의문을 표한 미희가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자기 목소리에 놀라냐?”

리빙빙이 투덜거림에 가까운 말을 내뱉았다. 얼굴을 보면 악마왕의 딸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외모. 악마왕의 씨를 받은 자들은 대게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기 마련이었으니까. 물론 자연스럽게 저렇게 태어났을 수도 있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고려하면 왕의 딸일거라 리빙빙은 확신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한심한 성격이라니.

“보통 너처럼 예쁘면 사람도 많이 겪게 되고 그렇지 않나?”

식칼은 좀 특이한 케이스였지만, 예린을 떠올린 리빙빙이 중얼거렸다. 리빙빙의 말에 미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게… 뭐… 장점도… 아니고…”
“아니 그게 왜 장점이 아니야? 예쁘게 태어난 게 싫어?”
“강간… 당할 뻔 한 적이 있어서…”

미희가 훌쩍이며 말했다. 사촌 오빠에게 강간 당할 뻔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훌쩍임이 점차 커지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리빙빙은 이제 맘대로 해라는 심정으로 커피나 마셨다. 리빙빙의 시선이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스트레스 쌓여. 뭐라도 짓고 싶다. 그녀는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각종 건축물을 마음으로 지어 올렸다. 자금성, 만리장성, 경산 공원. 도피에서 시작한 상상속에 건물 짓기는 꽤 재미가 있었다. 그녀는 마음으로 마음껏 설계도를 그리며 웅장한 건물을 떠올렸다.

“그런데… 아빠는 제가… 남자 홀리는… 훌쩍… 나 때문 이라고…”

미희의 말에 리빙빙은 즐거운 상상에서 깨어났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던 리빙빙이 미희에게 눈을 돌렸다. 그런 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미희의 옷은 수수했다. 펑퍼짐한 티셔츠와 바지는 그녀의 몸매를 가리고 있었고 꾸민 기색이 전혀 없는 얼굴이 보였다. 악세사리 하나 없는 미희의 모습에 리빙빙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칙칙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고민을 해결해 줄 만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네 능력은 뭐야?”

어색한 화제 전환이었지만 미희는 대답했다.

“문을 열 때 제가 원하면 이 방으로 돌아오게 되요.”
“허허.”

리빙빙이 이미 비어버린 커피잔을 만지며 공허한 웃음을 토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 리빙빙은 곧 들려온 주인의 목소리에 울분을 토했다. 지금 만난 참가자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한심한 성격인지를 폭로하는 그 내용에 미희는 그쳐가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울음 소리에 짜증이 난 리빙빙이 이런 여자를 정말로 보호해야 하냐는 질문을 내뱉았을 때 미희는 설움을 가득담아 울음 소리를 키웠다.

[요컨데, 그 여자는 공간을 다루는 거군.]
“그런가요?”
[네 능력하고 잘 맞을 거 같은데.]
“어디가요? 이 무능하고 쓸모없고 비관적인 여자랑 제가 잘 맞다구요?”

성태의 설명이 조금 더 이어졌다. 듣고 있던 리빙빙은 미심쩍은 눈으로 미희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미희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미희는 제법 지친 기색이었다.

“다 울었냐?”

아직 설움이 묻은 얼굴이었지만 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자.”

그렇게 말하며 리빙빙이 몸을 일으켰다. 방금 죽을뻔 했는데 나가자니. 미희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혼자 나가려 문을 열었는데 미희가 쫓아오지 않자 리빙빙은 짜증어린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며 돌아와 미희의 몸을 번쩍 안았다. 미희가 조금 바둥거렸지만 리빙빙은 신경 쓰지 않고 나갔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남자와 작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미희는 패닉에 빠져 아무 것도 못하고 죽은 듯이 있었다. 차에 타고 십여분을 달린 뒤 한 건물에 도착했다.

“집에 가봐.”

리빙빙이 눈앞의 건물 유리 문을 보며 말했다. 미희가 주저하며 말했다.

“유리문은 안되는데요…”
“대단도 하셔라.”

결국 건물 안쪽 화장실 문을 열고 미희가 들어갔다. 뒤따라 문을 연 리빙빙은 미희가 없는 화장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리빙빙과 미희가 커피를 마시던 그 방에 미희가 있었다.

“다른 데로는 못 가는 거야? 여기 밖에 못 와?”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았는 지 묻고 싶은 미희였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차 안에서 철수를 보고 겁에 질렸던 미희를 떠올리며 리빙빙이 물었다.

“남자가 무서워?”
“네.”

조금 있으면 주인님이 올 건데. 리빙빙은 곤란함을 느꼈다. 성태 앞에서 패닉을 일으킬 미희를 떠올리자 암담해졌다. 하필 자신이 담당한 참가자가 주인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는 데 벨이 울렸다. 미희는 움찔 했지만 리빙빙은 개의치않고 문을 열었다. 성태가 들어오며 리빙빙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가봐.”

리빙빙이 고개를 숙여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자 성태가 키득거렸다.

“걱정 마, 다 읽었어.”

성태가 손가락을 퉁기자 그의 모습이 귀여운 소녀의 차림으로 바뀌었다. 마법 소녀의 변신 능력을 수도 없이 흡수한 덕이었다. 짧은 랩 체크 스커트와 곧게 뻗은 성태의 허벅지를 보며 리빙빙은 자신의 몸이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눈을 흘기며 그녀가 말했다.

“정말… 이렇게 달아오르게 하시고 다른 일을 시키시다니.”
“나중에 놀아줄게.”

리빙빙은 떠났고 성태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미희는 새롭게 등장한 성태를 보며 긴장했다.

“저기… 아까 그 사람은?”
“제가 뭘 좀 시켜서, 떠났어요.”

웃고 있는 성태를 보며 미희는 자신의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모습에 수줍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당신도 악마에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달콤함이 묻어있어 당황한 미희였다. 단순히 질문할 생각이었는데도. 성태가 속삭였다.

“저는 참가자에요.”

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참가자였구나. 나는 이제 진짜로 죽는 건가.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담담한 체념이 자신을 점령했다. 고개 숙인 미희의 머리를 누군가가 어루만졌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미희가 고개를 들자 성태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안 죽어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미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가볍게 내민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킨 미희는 저도 모르게 성태와 집을 나갔다. 문을 열자 펼쳐진 공간은 원룸 복도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빼곡한 백화점. 미희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성태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무서워요?”

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익숙치가 않았다. 공포심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성태의 곁에 있으니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묘하게 안심이 되는 예쁜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희가 물었다.

“여기로 온건 당신 능력인가요?”
“아니요. 언니 능력이죠.”

성태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그 미소에 미희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는게 공포 때문인지 성태 때문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성태가 방금 들어온 문을 바라보자 미희도 시선을 따라했다.

“무서우면 다른 곳으로 가죠. 언니는 할 수 있어요.”

문을 열자 과연 성태의 말대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번에도 사람이 많은 거리였다는 것이다. 시장으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겁에 질린 미희가 성태에게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과는 좀 떨어진 골목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미희의 손이 다시 방금 나온 문을 열었다.

몇 번이고 이동했지만 그때마다 사람과 남자가 가득한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미희는 울상이 되어 성태를 바라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이었다고 하니 성태가 뭘 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한참을 이동한 그녀는 간신히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태와 함께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성태는 단지 미희가 이동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대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희의 눈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수록 그녀의 얼굴에 물드는 공포를 즐겼다. 성태의 최면이 끝난 것은 그녀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완전히 납득한 순간 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해봐요.”

자신의 방 외에는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았다. 옆에 누운 성태를 안으며 미희가 몸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장소가 떠올랐다. 사람이 없고 조용한,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숲 속 이었다. 성태의 손을 잡고 문을 열자 그녀는 정말로 그 숲에 있었다.

“와.”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으며 미희는 탄성을 흘렸다.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 좋았다. 예쁜 연못이 눈에 보이고 생명력을 뽐내는 커다란 나무가 잔뜩 뻗어있었다. 걸음을 옮기자 시원한 나무 그늘로 갈 수 있었다. 신이 난 그녀가 성태에게 손짓하자 그가 다가왔다.

“이게 당신 능력이에요. 가야 할 곳을 언제나 상상하도록 해요.”

여전히 원룸 안에 있는 미희였지만 자신이 숲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착각에 빠졌다. 자신의 옆에 앉은 성태를 보고 웃었다. 무서웠던 조금 전의 순간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당신은 요정 같네요.”
“그럼 더 그렇게 보이게 해야겠네요.”

성태의 손에 어느새 작은 봉이 들려있었다. 과장되게 의미없는 주문을 중얼거리자 미희가 까르르 웃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봉을 미희에게 향하자 그녀의 옷이 공주님 같은 드레스로 변했다.

“어?”

당황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예쁜 드레스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건… 나하고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약간은 시무룩한 목소리였기에 성태가 먼저 일어나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성태를 따라 연못으로 향했다. 연못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미희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부심인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어둠이 차올랐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는데.”


성태가 미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몇년 동안 품어왔던 상처를 어루만져진 느낌에 미희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조그마한 소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 소리를 키웠다.

형편이 어려웠던 집은, 사촌 오빠네 집에서 여러모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강간 당할뻔 했던 순간을 아빠에게 말하자 아빠는 자신을 비난했다. 네가 남자를 홀리는 년이라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편일 것이라 믿었던 가족의 비난에 무서워졌었다. 그녀의 마음은 원망을 품기보다 자책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족들에게 버림 받을까봐 무서워서. 사실은 원망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나빴어요.”

성태가 속삭이며 미희의 등을 토닥거렸다. 영혼이 치유 받는 듯한 느낌에 포근함을 느끼며 미희가 성태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응석부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싶었었다. 다행히 그는 받아주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익숙한 원룸 안, 침대 위에 성태와 서로 안고 누워있었다.

성태에게서 조금 떨어져 이불을 뒤집어 썼다.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다가 한참 연하임이 분명한 외모인데 어리광이나 부렸으니. 진정이 조금 되었을 때 이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성태의 얼굴을 보니 다시 마음이 쿵쾅거렸다. 같은 여자인데… 아까보다 더 설렘 가득한 마음이 느껴졌다.

“고백할게 있는데.”

성태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미희는 잠자코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고 성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남자거든요.”

당황한 미희의 표정을 보며 성태가 키득거렸다. 불신이 가득한 얼굴이었기에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치마 속에 집어넣었다. 미희는 느껴지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땠다.

“무서워요?”
“아뇨…”

남자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심장이 더 심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 마음이 들킬까봐, 그쪽이 더 두려울 지경이었다. 성태가 얼굴을 가져가 미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순순히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미희는 부드러운 느낌을 즐겼다.

“이상해요. 왜 안 무서운지… 저도 모르겠어요.”

미희는 스스로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차마 말 할 수는 없었지만 성태는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읽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참가자들은 왜 서로 죽이는 거죠?”
“상대방의 힘을 뺏을 수 있으니까.”

미숙한 화제 전환이었지만 성태는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근데 왜 저를 안 죽이세요? 능력이 보잘것 없어서?”

리빙빙의 태도를 떠올리며 물었다. 성태는 다시 한번 미희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혀가 미희의 입속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입 천장을 핥았다. 혀와 혀가 엮이는 생소한 감각에 미희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매력적이라서.”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성태의 얼굴을 보며 미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말한 이유와 야릇했던 감각이 그녀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재료가 되었다. 심장 소리가 더 커졌고 불안이 함께 몸집을 불렸다. 이러다간 소리가 들리겠어. 미희가 눈을 질끈 감자 성태가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요란한 소리네요.”

그 말에 심장이 더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성태는 소리를 즐겼다. 두근, 두근, 두근. 빠르게 울리는 박동 소리는 성태를 기쁘게 했다. 성태의 손이 미희의 바지를 조금 내리고 팬티를 어루만졌다. 충분히 젖어있었지만 미희의 몸이 조금 떨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분과 거기에 섞인 작은 공포를 성태는 놓치지 않았다.

“무서워요?”
“섹스는… 조금…”

아직은 느껴지는 거부감에 성태가 웃었다. 불안한 마음에 떨고있는 그녀를 보았다. 복잡한 그녀의 마음이 재미있었다. 섹스 자체에 대한 공포, 과거에서 비롯된 남자에 대한 공포, 자신이 거부한 것 때문에 자신을 위로해준 성태에게 버림 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성태는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걱정 말아요. 억지로는 안 할게요. 위로 받아야 할 아가씨니까.”

미희는 따스한 손길에 눈물을 가볍게 흘렸다. 성태의 말을 하나같이 자신을 보듬어주는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미희가 성태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세번째 키스가 이어졌다.

***

작가의 말

섹스씬이 없네요
오늘은 꽝입니다!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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